역사적으로 해상 봉쇄는 얼마나 효과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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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 BBC 페르시아어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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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혼란이 또다시 반복된 주말이었다.
위태로운 휴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금요일이었던 지난 17일(현지시간) 이란 외무장관은 상선에 대해서는 "해협이 남은 휴전 기간 완전히 개방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란 측은 미국이 이란 항구에 대한 해상 봉쇄 조치를 해제하지 않자, 이에 분노하며 불과 하루 만에 태도를 바꿔 해협을 다시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여러 유조선들이 이란 선박으로부터 공격받거나, 해협을 통과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고 보고했다.
미국의 최근 봉쇄 결정으로 전시에 활용되는 가장 오래된 압박 수단 중 하나인 해상 봉쇄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해상 항로를 차단해 적국의 경제를 뒤흔들고 무역을 방해해 항복이나 입장 변화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해상 봉쇄는 때로 효과적인 압박 수단이었으나, 그 영향은 훨씬 더 광범위하고 복잡하다.
1,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한 국가의 전쟁 지속 능력을 약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자지구와 예멘 봉쇄 사례처럼, 지속적인 정치적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고 인도주의적 위기만 심화시킨 경우도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독일 봉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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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1914~1919년) 당시 독일을 겨냥한 해상 봉쇄는 "원거리 봉쇄"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영국은 독일 항구를 직접 차단하는 대신, 북해 지배력을 활용해 해상 교통 흐름을 통제했다.
영국 해군은 오가는 선박을 감시하고, 중립국에 압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독일을 사실상 세계 무역망에서 고립시켰다. 시간이 흐르면서 봉쇄 대상 품목 역시 군수품을 넘어 식량, 비료 등으로도 확대됐다.
초기만 해도 독일은 중립국과의 무역 및 국내 적응을 통해 어느 정도 충격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물자 수입량은 급감했고, 주요 물자의 부족으로 농업과 산업 생산량이 곤두박질쳤다.
그 사회적 영향은 심각했다. 1916년에는 식량 부족이 위기로 번졌다. 이른바 '순무(루타바가)의 겨울'로 불리는 이 시기는 기근과 궁핍의 상징이 됐다. 역사가들은 이 당시 민간인 수십만 명이 영양실조와 관련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추산한다.
물론 이러한 봉쇄가 독일 패망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독일의 전쟁 지속 능력을 약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의 일본 봉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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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해상 보급로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봉쇄에 특히 취약했다. 섬나라인 일본은 해상 운송로를 통해 석유·원자재·식량을 수입하고, 태평양 전역의 군대에 보급품을 공급했다.
1943년부터 미군 잠수함은 일본 상선을 점점 집중적으로 공격했고, 이후에는 '기아 작전'으로 알려진 공중 기뢰 부설 작전으로 핵심 해상 항로를 더욱 집요하게 차단했다.
그렇게 전쟁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 상선대는 사실상 전멸 상태에 이르렀고, 이는 전시 경제 붕괴의 주요 원인으로 평가된다.
게다가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해상에서의 이 압박을 완화할 만한 유의미한 육로 운송로도 없었다.
일본의 항복은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지만, 해상 보급로의 단절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2년 쿠바 '해상 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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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미사일 위기는 해상 압박이 활용된 또다른 사례다. 당시 미국은 법적 문제를 피하고자 의도적으로 '봉쇄(blockade)' 대신 '격리(quarantine)'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쿠바에 소련의 군사 장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미 해군을 배치했다.
작전의 목표는 분명했다. 소련의 추가적인 미사일 배치를 저지하고, 소련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한 달도 채 지속되지 않았으며, 주로 억지력으로 작용했다. 실제 충돌 위험에 직면한 일부 소련 선박이 결국 발길을 돌린 것이다.
집중적인 외교적 노력까지 더해지며, 이 위기 상황은 결국 소련이 쿠바 내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고, 미국은 비밀리에 튀르키예 내 미사일을 철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당초 내세웠던 목표 대비 성과 측면에서, 이 격리 조치는 대체로 효과적이었다고 평가된다.
UN의 이라크 해상 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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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UN 안전보장이사회는 해상 교통에 대한 감시 및 제한 등을 포함해 이라크를 광범위하게 제재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시행된 이러한 제재로 이라크는 경제적으로 고립됐고, 결국 국제사회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의 해상 접근성이 이미 크지 않았음에도, 이러한 해상 제재는 석유 수출을 억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다만 육상 대체 경로를 통해 어느 정도 제재를 우회할 수 있었고, 해상 봉쇄의 효과는 일부 상쇄됐다.
이러한 봉쇄 조치는 다른 광범위한 제재 및 군사적 압력과 결합할 때 가장 큰 효과를 발휘했다.
구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해상 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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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전쟁 당시 UN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FRY, 현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의 전신 국가) 제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연합(EU)의 공조 아래 해상에서 집행됐다.
1992~1996년 이탈리아반도와 발칸반도 사이 아드리아해를 지나는 선박 수천 척이 검문받았으며, 수백 척이 항로를 변경하거나 저지당했다. 비교적 협소한 지리적 특성 덕에 집행도 용이했다.
이 같은 조치는 제재 위반에 따르는 비용을 높여 제재의 효과를 한층 강화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분쟁을 끝내지 못했다. 분쟁 해결을 위해서는 군사적, 외교적 압력이 더 폭넓게 병행돼야 했다.
가자지구 봉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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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부터 시행 중인 가자지구 봉쇄는 이동, 무역, 자원 접근을 광범위하게 제한하는 조치의 일환이다.
2009년부터 강화된 해상 봉쇄는 가자지구의 해상 접근을 막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무기 밀수를 막기 위해 필수적인 조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도주의 단체들은 이로 인해 가자지구의 경제와 생활 환경이 심각하게 파괴됐다고 주장한다.
이 봉쇄의 법적 지위에는 여전히 논란이 따른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2024년 자문 의견에서 이 지역 상황에 대해 지속적인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한편 수년간 이어졌음에도, 이 봉쇄 조치는 해당 지역에서 반복되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지 못했다. 압박 수단으로서는 효과가 있지만, 지속적인 안보나 정치적 해결로는 이어지지는 못한 것이다.
사우디 주도의 예멘 봉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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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주도의 연합군은 후티 세력에 대한 무기 유입을 차단하고자 예멘의 항구와 영공 접근을 제한해왔다.
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예멘이기에, 이러한 조치는 민간인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UN은 이 지역의 기근 위험, 연료 부족, 의료 시스템 압박을 반복적으로 경고해오고 있다.
이에 안보 우려와 인도적 필요 사이의 균형을 맞추고자 점검 절차가 도입됐으나, 잦은 지연으로 물자 공급에 차질이 발생하고는 한다.
이 같은 봉쇄는 후티에 대한 압박 수위는 높였으나, 결정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다. 오히려 장기적인 인도적 위기를 초래하며 지속적인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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