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 미사일 공습으로 숨진 선원과 바다에서 24시간을 버틴 생존자의 이야기
사진 출처, Wajid Khan
- 기자, 모하마드 주바이르 칸
- 기자, BBC 월드 서비스
- 기자, 그레이스 초이
- 기자, BBC 월드 서비스
- 읽는 시간: 6 분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겨냥해 첫 공습을 감행한 날, 하산의 배는 이란 남부의 한 항구에서 시멘트 선적을 막 마친 상태였다.
이어진 공격으로 끊임없이 폭발이 일어났고, 화염과 파편이 항구 위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파키스탄 출신의 신입 선원 하산(가명, 22세)은 "마치 영화 같은"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모든 공격이 우리 근처에서 벌어졌고, 파편이 바로 옆에 쏟아졌습니다."
며칠 후, 선원들은 결국 출항을 결정해 바다로 나갔으나, 이들이 탄 배는 미사일에 맞아 침몰했다. 선원들은 바다에 휩쓸렸고, 하산은 구명조끼와 물에 떠 있던 파이프에 의지해 간신히 버텼다.
"파도가 거세고 물도 굉장히 차가웠습니다."
처음에는 구조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도 품었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며 희망도 사그라들었고, 서로를 쳐다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익사해 죽을 것이고, 그 누구도 우리의 죽음을 알지 못하리라 생각했다"는 그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24시간가량 바다에서 표류하던 하산과 1명의 파키스탄인, 4명의 이란인 동료들은 마침내 지나가던 이란 선박에 의해 구조됐다.
하산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조차 없던 상태"였다면서 "그런데 그 배가 우리를 구해주었고, 먹을 것과 마실 물도 주었다. 기적과도 같았다. 새 삶을 얻은 듯했다"고 덧붙였다.
하산은 이란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에 맞서 국제 주요 해상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봉쇄한 이후, 걸프만에 발이 묶인 선박 약 3000척의 선원 4만여 명 중 하나다.
이 같은 수치는 '방글라데시 상선 선원 협회' 회장인 아남 초우두리 선장이 밝힌 것으로, 그는 선박 수를 점점 더 정확히 파악하게 되면서 실제 발이 묶인 선박 수가 상당히 늘어났다고 지적했다.
사진 출처, AFP / Royal Thai Navy
아울러 하산은 운 좋게 고향으로 돌아온 몇 안 되는 선원 중 하나다. 구조된 뒤 이란으로 돌아오자, 선주는 하산과 파키스탄 동료에게 여권과 함께 약간의 여비를 건넸다. 하지만 25만파키스탄루피(약 134만원)에 달하는 5개월 치 임금은 받지 못했다.
이란 전 지역이 사실상 비행금지구역이 되면서 하산은 평소보다 2배나 긴 24시간의 "위험천만한" 육로 이동 끝에 고국에 도착했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는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 몰리며 교통 체증이 심했고, 언제든 미사일이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가 불안해했다.
하산은 "(테헤란의) 택시 운전사조차도 매우 겁에 질려 있었다. 그 역시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에 집을 나선 것이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란 곳곳에 경찰 검문소가 설치돼 있었고, 여행객들은 철저한 검문을 거친 후에야 통과할 수 있었다.
귀국길 내내 길에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거의 없어, 두 사람은 과자 3봉지와 물 2병으로 버텼다.
슬픔에 잠긴 가족
사진 출처, Getty Images
한편 모두가 이란에서 살아남아 고국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파키스탄 출신의 또 다른 초보 선원 야시르 칸(24)은 3월 24일 같은 항구에서 미사일 공격으로 끝내 숨졌다.
초우두리 선장에 따르면, 전쟁이 시작된 이후 상선 공격으로 선원 십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 며칠 동안 카라치 마노라 섬에 있는 야시르의 고향집에는 수백 명이 방문해 조의를 표하고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파키스탄에서는 전통적으로 유가족이 요리를 하지 않는다.
가족과 친구들이 기억하는 야시르는 활기 넘치고 명랑하며, 친절한 청년이었다.
형제인 와지드는 "아버지는 그래도 꾹 참고 용기를 내는 듯하지만, 어머니와 야시르의 아내는 매우 힘들어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들은 계속 '야시르의 시신은 언제 오는 거야?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거야?'라고 묻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뭐라도 드시도록 노력하지만, 야시르의 아내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습니다."
와지드에 따르면 야시르는 예인선에서 일자리를 얻었고, 지난해 9월에야 처음으로 이란에 갔다.
와지드는 그는 "꿈이 컸다"면서 "성공해서 아내와 아이를 돌보고, 더 나은 삶을 물려주고자 했다. 그래서 이란에 갔다"고 했다.
지난달 21일, 이스라엘의 성월 '라마단'의 종료를 기념하는 '이드' 첫날, 야시르는 평소처럼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왔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와지드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더니 "여기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 후 며칠 동안 형제로부터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고, 와지드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와지드는 "어떻게든 정보를 얻으려고 애썼다"면서 "처음에는 야시르가 살아 있으리라 믿었다. 어떻게든 해안이나 다른 배에 도착했거나, 어딘가에서 부상을 입었을거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다 결국 야시르가 선실에서 깊은 잠을 자던 중 날아든 미사일의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가 타고 있던 배는 순식간에 완전히 가라앉았고, 승선했던 모든 이들이 물에 빠졌다. 마찬가지로 파키스탄 출신인 선원 1명만이 살아남았다.
생과 사
사진 출처, Wajid Khan
하산은 이제 자신이 겪은 일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느낀다. 배가 침몰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이란에 발이 묶여 있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국경에서 5일이 더 걸려 드디어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와 형제들, 이모들까지 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반겼다.
하산은 "어머니를 아주 오랫동안 껴안았다"면서 "더 이상 아무것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라고 했다.
두바이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서 온 전화도 받았다.
"아버지 역시 눈물을 흘리셨다. 나를 위로해주시더니 자신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는 그는 "아버지는 안전하게 계신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파키스탄에 돌아오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 귀국하면 다시는 두바이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고, 이는 우리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큰 손해라고 하셨습니다."
하산은 선원이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다시는 이란에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와지드에 따르면 유가족은 야시르의 시신을 땅에 묻었으나, 그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야시르의 아들은 이제 겨우 3살이다.
와지드는 "조카가 눈에 밟힌다"면서 "이 어린 아이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다"고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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